웃는 자의 자화상. Yue Min Jun, ‘The Tao of Laughter’ Exhibition at Harbour City, 2012 홍콩 하버시티(Harbour City)의 갤러리 공간 한가운데, 천장까지 닿을 듯한 캔버스 위에 동일한 남자의 얼굴이 여러 개 겹쳐 웃고 있다. 붉은 입술, 부자연스럽게 과장된 표정, 균일한 인상. 그것은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듯한 ‘기계적인 웃음’이다. 그 장면은 마치 한 사람의 인생을 억지로 클로닝한 듯한, 웃음의 반복이었다.
중국 현대미술의 거장, 웨민쥔(Yue Min Jun). 그는 이 웃는 얼굴로 전 세계 미술계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그의 웃음은 결코 유쾌하거나 편안하지 않다. 오히려 보는 이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리고 바로 그 불편함이, 동시대의 자화상을 가장 정직하게 드러낸다. 웃음의 역설, 웃음의 슬픔. 이번 전시 타이틀은 ‘The Tao of Laughter’. 직역하면 ‘웃음의 도(道)’다. 불교와 도가(道家)의 철학적 이미지가 겹쳐지는 이 타이틀은 어쩌면 웨민쥔 예술세계의 핵심 정서일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웃고 있지만, 아무도 웃고 있지 않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고, 눈은 감겨 있으며, 치아는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 웃음의 형태는 어딘지 모르게 ‘고정된 기계적 웃음’이다. 강요된 듯한 자유, 조롱을 품은 긍정, 어색한 기쁨.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 작품 속 인물은 모두 바보 같다. 그들은 웃고 있지만, 그 웃음 속에는 강요된 듯한 부자유스러움과 어색함이 숨어있다.”
웃음은 이 시대의 가장 은밀한 자기 검열일지도 모른다. 기쁨이 아닌, 생존을 위한 웃음. 냉소적 사실주의자, Yue Min Jun. Yue Min Jun은 1990년대 중국 미술계의 대표적 흐름인 ‘냉소적 사실주의(Cynical Realism)’의 선구자로 분류된다. 이 흐름은 톈안먼 사태 이후 중국 사회의 이념적 혼란과 허무주의, 그리고 급속한 자본화 과정에서 나타난 ‘자아 해체’에 대한 미술적 반응이었다.
그는 작업을 통해 말한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웃는 사람들을 그린다. 그들은 조종당하고, 자신의 기쁨을 남에게 위탁하며 살아간다.” 이 웃음은 중국만의 자화상이 아니다. 전 지구적 신자유주의 사회의 ‘보편 자화상’이다. 오늘의 우리도 어쩌면, 그와 다르지 않다.
비판과 초탈 사이, ‘Tao’로서의 예술. 이번 전시 제목에 담긴 ‘Tao’는 단지 장식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작가가 웃음을 통해 ‘무위(無爲)의 진리’를 탐색하는 과정이다. 그의 웃음은 억지로 웃는 자아를 조롱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초탈하려 한다.
그림 속 수많은 똑같은 웃음들은 결국 단 하나의 감정 없는 얼굴로 수렴된다. 이것은 감정의 삭제가 가져온 자유, 혹은 감정을 지워야만 얻는 체념의 평화이다. 그렇기에 그의 웃음은 다르면서도 동일하고, 가볍지만 무겁고, 희극이면서도 비극이다.
팝아트와 냉소의 융합. Yue Min Jun의 작업은 때때로 팝아트와 비교된다. 하지만 그 속성은 사뭇 다르다. 앤디 워홀이나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팝아트가 대중문화와 소비이미지의 향연을 긍정하거나 전유한 반면, 웨민쥔의 팝적 형상은 비판과 해체의 도구다. 그의 웃는 얼굴은 상품도 아니고, 희극도 아니며, “정치적 침묵의 아이콘”이다.
우리는 그 웃음을 보며 웃지 못하고, 비로소 생각하게 된다. 나뭇가지가 아닌, 아트보이 마음이 움직인다. 전시장을 빠져나오며 떠오른 고사 하나.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대답했다.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다. 움직이는 것은 네 마음이다.”
Yue Min Jun의 웃음 또한 마찬가지다. 그것은 정지된 얼굴이지만, 우리를 움직이게 만든다. 그 웃음은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도구다. 침묵한 채, 웃는 얼굴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얼굴을 발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