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 쿤스의 발레리나 앞에서, 아트보이는 예술촉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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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보이 뉴욕 제프 쿤스의 발레리나 전시 기록 대표 썸네일 배너

뉴욕 집 거리 벤치에 앉아 예술촉감이 오기를 기다리기로 한다. 혹은 예술작업에 다른 예술촉감이 다가와 모습을 보이기를. 그렇게 아트보이는 뉴욕의 공기를 들여 마시며 한동안 예술촉감을 기다렸다. 그러나 한동안 기다려도 예술촉감은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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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나타날 기척도 없었다. 아트보이는 예술소식을 발견하고 벤치 위에 있던 모바일을 챙겨서 걸음을 움직인다. 따로 카메라를 챙기지 않아도 모바일은 카메라 역할을 톡톡이 해준다. 그 역할이 허락해 주는 만큼. 아트보이는 예술촉감을 사진으로 담는다. 몇 가지 예술 작업 가능성이 머릿속을 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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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면서 예술 의식이 묵직한 자루가 되어 바닥 모를 구렁으로 가라앉았다. 얼마나 걸음을 걸었을까. 무슨 소리가 들려서 흠칫 눈을 뜨자 아트보이 앞에 제프쿤스의 거대 작품이 서 있었다. 푸른 하늘 햇빛을 받고 서 있는 거대 작품은 금빛을 내며 고개를 떨구고 앉아 있는 발레리나 설치 예술작품이었다. 그 크고 금빛 밝기 덕분에 그 주변은 완전히 예술기운으로 가득했다. 조금 전까지 느껴진 뉴욕도시의 클래식 느낌은 어딘가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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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작품에 시선이 빼앗긴 아트보이는 쉽게 예술 기운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고개를 떨구며 앉아 있는 발레리나의 눈을 마추지자 고개를 몇 번 작게 끄덕였지만 아트보이 시선에 딱히 의견이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소통을 하려는 말 같은 것도 없다. 아트보이가 시선이 빼앗긴 사실을 이미 누군가에게서 들었는지 혹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는지 발레리나 표정을 보고는 판단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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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만약 아트보이의 시선을 알고 있었더라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라는 표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네가 뿜어 내는 예술 기운은 진한 예술촉감으로 아트보이에게 천천히 스며들어왔고, 몸과 머릿속이 예술로 가득해졌다. 아트보이는 한동안 그렇게 발레리나 시선 밑에 서 있었다. 두꺼운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오래된 록펠러 타워 광장 앞에 앉아 있는 발레리나에게는 무수히 많은 예술의 잔향이 배어 있다. 긴 파란 스커트 밑으로 엿 보이는 발레리나의 다리는 곧고 하얗고 싱그럽다. 그 아름답고 매끄러운 종아리의 모양에 아트보이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기고 만다. 이날 작품에서 느낀 예술촉감을 작업 책상에 올려놓는 건 아트보이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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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보이는 그 예술촉감을 잊지 않기 위해서도 주의 깊고, 조심스럽게 작품을 사진에 담는다. 뉴욕 하루에 세 개의 전시회를 읽어낼 때가 있는가 하면 두 개밖에 못 읽을 때도 있다. 읽는 데 긴 시간이 걸리는 전시회도 있고, 비교적 짧게 끝나 버리는 전시회도 있다. 대게 예술촉감을 기다리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같다. 그러나 지금껏 세 개를 넘어간 적은 없다. 다 읽은 전시회는 더 안쪽에 있는 작업 책상으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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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고 난 오래된 전시회 내용이 책상의 선반을 가득 채워가며 예술촉감을 다 확장해나가는 것에 어림잡아 적어도 십 년은 걸릴 것이다. 또한, 나날이 새로 더해지는 전시회 내용을 전부 더해 간다면, 예술촉감을 확장하는 것은 더욱 오래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해봤자 뾰족한 수는 없다. 아트보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눈앞에 놓인 예술작업을 하나하나 완성해 나가는 것뿐이다. 그 이유도 목적도 충분히 납득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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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쿤스의 앉아 있는 발레리나 설치 예술작품은 무언가를 전달하려 한다. 아트보이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하지만 작품이 전달하는 건 아트보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예술 화법이며 귀에 익지 않은 언어였다. 그럼에도 하나하나의 예술촉감은 제각기 예술 언어를 내포한 채 어딘가로 빨려들 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아트보이 몸을 그대로 통과해서. 작품 읽기 작업을 거듭하는 사이 아트보이는 그런 통과의 감각 또는 스며드는 감각을 강하게 느꼈다. 예술과 작품이 원하는 건 일반적인 의미의 이해가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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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되는 측면이 있었다. 그리고 아트보이를 통과해 가는 예술촉감은 때때로 아트보이의 안쪽을 기묘한 각도에서 자극하고, 오랫동안 망각했던 아트보이 안의 몇 가지 감흥을 일깨웠다. 그렇게 작품의 예술 숨결에 의해 아트보이는 예술촉감이 훅 피어오른다. 뉴욕 도시에서 만나는 예술촉감이나 작품은 하나 같이 매우 훌륭하거나 감각적이다. 대게 그렇다. 그러나 작품 자체는 미국 화법 표현 요소가 일반적이다. 그렇게 본다면 일본 예술 작품 자체가 일본 화법 스런은 것과 똑같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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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친근하고 정겨운 거리를 따라 곳곳에 여러 예술촉감을 찾으며 뉴욕 생활을 하고 있는 아트보이. 거리 맞은편 갤러리는 뉴욕 도시 예술 감각에 동화된다. 그렇게 아트보이도 조금씩 이 도시의 일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아트보이는 그 점을 기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예술촉감도 이렇게 기뻐해주고 있으니까. 오랫동안 계속된 아트보이의 예술 산책은 무슨 이유에선가 한 차례 방문하고서도 예술촉감을 만나는 것에 애를 태웠다. 어딘지 간절하면서도 동시에 예술 너머 마음을 사로잡는 예술 작업의 연장선 때문 일 것이다. 예술촉감이 사는 곳은 도시와 예술작품세계의 중간 지점이다. 아트보이는 예술작품세계에 들어갈 수 없고, 예술촉감은 도시로 들어올 수 없다. 예술 갤러리 공간은 예술촉감을 잃은 사람과 아트보이에게 예술촉감을 만나고 교류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아트보이는 생기 넘치는 나뭇가지 잎 사이로 푸른 구름이 낀 뉴욕 하늘을 올려다 보고, 천천히 뉴욕 집 쪽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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