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속에서 피어나는 감각, 아트보이(ART BOY)의 예술 생활습관

ART 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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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보이는 뉴욕집에서 그림을 그린다. 여기저기서 영감 받은 예술 촉감이 곳곳에 새겨지도록. 뉴욕 예술생활습관에 익숙해져 하루 한 번 거리를 거닐며 스트릿 아트를 감상하고, 뉴욕 도시 곳곳에 만발한 갤러리, 뮤지엄을 마음껏 향유하는 아트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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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벽에는 예술이 붙어 있다. 지하철 기둥에도, 거리의 침묵에도, 갤러리 조명 아래에도. 그곳을 걷는 아트보이의 눈은 그것을 본다." 세련되고 예술 영감이 활기차게 풍기고 있는 예술 촉감을 느끼러 뉴욕 예술 시간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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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다운 예술 촉감을 느낄 수 있을 때는 이때 한 번뿐이다. 아트보이는 점심 나절 이 거리 저 거리의 활기찬 뉴욕예술생활습관에 오후를 보낸다. 시간은 평온하게 흘러간다. 갖가지 전시회를 열고 있는 갤러리 공간이 있고, 그걸 관람하는 사람들과 아트보이가 있다. 그 사이 잠깐의 떠오르는 전시회 일정이 무언가의 기억 이끌림처럼 강하게 솟구쳤다. 기억 의식은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이게 하고 거리를 걸어서 어느 갤러리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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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갤러리와 가까워지면 아트보이는 다시 몸속으로 예술 촉감을 느낀다. 그러므로 예술 촉감은 언제나 아트보이와 예술의 것이다. 아트보이는 전시되어 있는 작품을 읽으면서 천천히 시간을 들여 완성된 시작도 끝도 없는 확신에 차 있는 촘촘한 작가의 예술 기운을 발견한다. 이 뉴욕 도시의 다른 많은 예술 기운 것과 마찬가지로 견고하고 흔들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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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보이와 예술 촉감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갤러리 공간을 걸으면서 말도 필요로 하지 않는 침묵을 갖는다. 침묵은 예술 기억을 일깨워주므로 딱히 서로 간의 침묵에 신경 쓰지 않는다. 갤러리의 고요함 속에서 예술은 소리를 낸다. 그것은 소리라기보다 감각이고, 아트보이에게는 오래된 친구처럼 익숙하고도 반가운 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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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보이는 예술 촉감을 가만히 느끼고 싶지만 이곳에서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작업 책상에서 느끼자" 아트보이는 말한다. 예술 촉감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갤러리 공간에서 쉼 없이 느껴지는 예술 촉감은 아트보이에게 그만한 확신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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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성장 가능성은 형태를 갖추고 있지 않지만 어딘가에 끝나지 않을 듯 그저 시간이 걸려 기나긴 작업 과정 뒤에는 단단한 작품 형태로 정확히 드러나게 된다. 그 사실은 영원한 사이클이다. 그러나 그 사실은 되도록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변화하지 않는 존재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술과의 심적인 유대가 보다 강해지는 예술 기운을 아트보이는 갖는다. 어떠한 종류의 엄숙함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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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예술 촉감이 느껴지기를 원할 때 아트보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조용히 예술 영감이 쏟아지는 작업 과정의 결정체 광경이다. 어디로 향하면 좋은지, 그 작업 과정 이미지를 떠올린다. 아트보이와 예술 촉감은 전시되어 있는 작품을 함께 감상함으로써 어느새 이미 완결되었다. 이미 완결된 것이 새삼 분리한다고 한들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예술 촉감은 아트보이의 어깨 위에서 속삭인다. ‘이제 무엇이 펼쳐질지 몰라,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미지의 공간이 있잖아. 그게 바로 예술의 출발선이야.’ "안 그래?" 아트보이는 그 말이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 무한의 가능성은 불가피하게 오직 하나뿐인 예술 작품 결과물 현실로 치환된다. 아트보이는 그게 괴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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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예술 촉감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말없이 전시 작품을 바라보는 것에 몰두한다. 생각보다 어려운 작업이다. 전시회를 둘러보고, 작품을 파악하고, 거기에 정확한 예술 촉감을 느끼고 이해하는 것. 이 모든 작업의 단계도 아트 컬렉션의 일부이며 예술 촉감과 함께하는 작업 과정이다. 너도 예술가이며 이웃에 사는 예술가들도 뉴욕 예술이 어떤 모양인지에 대해 정확한 지식이 없었고, 딱히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 듯했다. 또한 그들이 "대충 이럴 거야" 하고 그려주는 예술작품의 형상은 제각각 판이하게 달랐다. 어떤 것은 예술 모양에 가깝지도 않고, 어떤 것은 형편없고, 어떤 것은 예술 모양 자체도 모양새를 잡지 못한 쓸모없는 것들도 있다. "아트보이는 왜 그런 걸 알고 싶어 하지?" 어느 예술가는 미심쩍어하는 표정으로 아트보이에게 물었다. "이 예술작품 모양새가 어떻게 생겼는지 안다 한들 무슨 쓸모가 있다고?"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라고 아트보이는 설명했다. 예술 촉감과 절대적 지식을 얻고 싶을 뿐이다. 그것은 무슨 쓸모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어느 예술가는 "절대적인 예술 촉감"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개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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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얼굴에 경계의 빛을 띠며 아트보이한테 나쁜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눈빛으로 아트보이를 훑어 보았다. 그래서 아트보이는 그 이상 묻기를 단념했다. 다른 예술가들, 너를 포함해서. 아트보이 질문에 보이는 반응은 어느 예술가의 이해력 정도와 엇비슷했다. 그리고 그런데 흥미를 가지는 아트보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잘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그것이 아트보이에게는 신기한 일이었다. 자신이 풀어 나가고 있는 예술작품에 대해 보다 많은 것을 알고, 거기에 담겨야 할 절대적인 예술 촉감을 자연히 품을 법한 감정 또는 의지와 소신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이 예술가들에게는 원래부터 호기심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혹은 존재하더라도 극히 희박하며 범위도 좁게 제한되어 있거나 그게 이치에 맞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만약 뉴욕 도시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 예술작품의 절대적인 예술 촉감에 호기심을 느낀다면, 그때는 한 번 진지한 생각을 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마음의 움직임은 예술계에 바람직한 일이겠지. 예술과 예술작품은 빈틈없이 완결된 상태여야 하니까. 아트보이는 예술작품의 형상 완결을 위해서라면, 발품을 팔아 직접 완성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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