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위의 춤, ART HK 12와 실험예술의 현재. 홍콩의 습도 높은 공기 속에서, 하나의 거대한 미술 세계가 열린다. 2012년 5월, 아트보이는 홍콩 컨벤션 센터(HKCEC)를 찾았다. ART HK 12, 그리고 그 위성 페어들. 전시장이 열리는 순간, 숨이 잠시 멎는다. 전 세계 갤러리스트, 컬렉터, 아티스트, 매체들이 뒤섞여 하나의 진동을 만들어내는 현장. 그 현장은 예술의 중심이 아니라, 예술의 ‘경계’였다.
세계의 시선, 홍콩에 모이다. ART HK12는 단순한 지역 행사 그 이상이었다. 세계 3대 아트페어 중 하나인 아트바젤(Art Basel)이 주관하며, 스위스 MCH 그룹이 지분 60%를 매입함으로써, ‘아시아의 아트 바젤’이라는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출렁이는 순간이었다. 전시 기준은 더욱 까다로워졌다. 작가와 갤러리의 선별은 더욱 엄격했고, 그만큼 참가작들의 긴장도 높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호텔 하얏트, 파크레인 호텔 등 곳곳에서는 스푼아트페어, 그리고 제1회 홍콩컨템포러리 아트페어 같은 위성 행사가 동시에 진행되며, 예술의 물결이 도시 전역을 뒤덮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아트보이는 한 가지 질문을 붙잡는다. “실험예술이란 무엇인가?”
실험예술, 경계에 선 자들. 1990년대, 아시아 대륙의 실험예술은 다의적인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단순한 ‘비정형’이 아니었다. 정치화된 기관예술, 미학적 소양을 추구한 학원예술, 도시유행과 대중매체에 기댄 유행미술, 그리고 해외화랑이 키운 고급 상업미술. 이 네 가지 체계와 엉키고 얽히며, 실험예술은 늘 경계 바깥에서 존재해야 했다. 그러나 경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경계는 ‘이동’한다. 예술가의 신분 또한 이동한다.
실험예술가들은 종종 학원에 소속되거나, 상업 갤러리와 계약하고, 때로는 거대한 전시의 큐레이터로 바뀌기도 했다. 그들은 현실과 이상, 주변과 중심을 오가는 유영자들이었다. 이들은 ‘경계를 넘는 자’였지만, 동시에 ‘경계를 만들어내는 자’이기도 했다.
Shifting Boundary, 이동하는 경계, 유영하는 존재. ‘경계(境界)’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장소나 범위의 한정이 아니다. 예술, 정치, 정체성, 의식의 한계. 그리고 우리가 예술을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대한 자문이다. 경계는 위험하다. 경계를 넘는 자는 늘 감시를 받는다. 그러나 경계를 넘지 않는 자는 새로운 것을 만들지 못한다. 이동경계(Shifting Boundary)라는 개념은 단지 공간의 변화가 아니라, 자기 신분의 재구성, 정체성의 해체와 재창조를 의미한다.
예술가는 끊임없이 경계에서 자신의 정체를 질문하고, 그 질문의 연속이야말로 실험 그 자체다. 실험의 종말과 실험의 확장. 한 가지 역설. 실험은 성공하면 실험이 아니게 된다. 실험이 제도화되면, 더 이상 실험이 아니다. 많은 작가들이 상업화와 제도 속에서, 자신의 초기 ‘실험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포장된 이력으로 소비당하고, 결국 ‘안전한 경계 안’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이 시대의 실험예술은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자기 모순조차 표현의 소재로 삼는다. 다면성과 위선을, 상품성과 순수성의 모호함을 의도적으로 교차시킨다. 그리고 그 모순 자체를 관객에게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만든다. 번데기와 양파, 삶의 층위들. 전시장을 빠져나오며 아트보이는 다시 질문한다. “아트보이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좋은 상상, 좋은 마음. 그것이 공기 번데기가 되어 피어나기를. 삶은 양파와도 같다. 껍질을 벗길수록, 때때로 울게 된다. 그러나 그 눈물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층위의 감각과 감정을 만나게 된다.
예술 또한 그렇다. 표면적인 이미지 너머에, 층위마다 다른 진심이 숨어 있다. 그 속을 껍질 벗기듯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저 소비하는 자에 불과하다. 오늘의 실험은 내일의 진실이 된다. 예술은 언젠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느 경계에 서 있는가?” 실험예술은 단순한 파격이 아니다. 그것은 경계에 서서, 그 경계를 재정의하려는 태도다.
오늘 ART HK에서 아트보이가 만난 수많은 작가들의 시선은 거대한 시장의 한가운데서도 여전히 자신만의 소우주를 꿈꾸고 있었다. 그리고 그 꿈은 곧 미래의 기준이 될 것이다. 그것이 오늘의 실험이 가진 유일하고도 명확한 가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