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타이완을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아트보이는 솔직히 별다른 기대가 없었다.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들여다본 적 없던 나라, 그만큼 무심했던 땅. 그래서일까. 비행기 문이 열리고, 낯선 공항에 도착했을 때의 공기도 마치 어딘가에서 몇 번쯤은 마셔본 적 있는 향 같았다. ‘덥다’는 말이 먼저였고, 곧 ‘익숙하다’는 느낌이 따라왔다. 입고 있던 재킷을 벗으며 리무진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는 길, 이 도시의 풍경은 허름한 콘크리트 건물과 깔끔한 유리 벽이 서로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나란히 서 있었다. 모순이 아닌 공존. 지나간 시간과 현재가 동등한 아름다움으로 묘하게 어우러진다.
전철을 타고 거리를 걷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인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무의식중에 아트보이가 떠올린 도시의 감정은 ‘일본’이었다. 일본처럼 느껴지는 길거리와 간판, 토요타, 혼다가 줄비한 도로, 편의점에서 손에 집히는 상품들도 익숙하다. 그제야 알겠다. 왜 처음부터 거리감이 없었는지를. 하지만, 입안의 낯섦은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음식만큼은 확실히 다른 방식으로 나를 맞았다. 익숙한 듯하다가도 향신료의 강렬함이 튀어나오면 “윽”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럼에도 몇몇 음식들은 이 낯선 여행자의 미각을 보듬어주는 듯 조심스럽게 반겨주었다.
그렇게 한 끼를 넘기고, 또 거리를 걷는다. 비 오는 날, 아이를 가슴에 안은 채 바이크를 타고 거리를 가로지르는 여자의 모습은 이 도시의 삶의 방식이 무척 강인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도시는 말한다. “우리는 그렇게 다르지 않아.”
작지만 다른 움직임, 문화라는 숨결. 눈에 띄는 것은 거리 위 사람들만이 아니다. 불쑥 나타나는 문화의 결 같은 것. 벽에 붙은 작은 전시 포스터, 지역 커뮤니티 공간 앞을 수놓은 수공예 디자인. 작지만, 그리고 거대하지 않지만 분명히 문화가 흐르고 있다. 그것은 이 도시가 경제를 살아가는 또 다른 방식이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수출이라는 거대한 동력에만 경제의 생명을 의존해왔다. 그러다 보니, 문화가 내수의 힘이 된다는 상상조차 어려웠다. 문화는 그 자체로 자산이다. 도시는 거대한 흐름이다. 그리고 그 흐름 안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콘크리트나 철골이 아니라 문화다.
문화는 사람이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방법이고,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세계를 물려주는 방식이다. 우리는 어쩌면 너무 조급하게 산업을 말하고, 너무 빠르게 소비를 말하고, 너무 무심하게 문화의 시간을 잊어온 것은 아닐까. 뿌리 깊은 나무를 생각한다. 그렇기에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를 떠올렸다. 한글 창제를 통해 문화의 뿌리를 세우고자 했던 세종의 고군분투. 그 시대와 지금은 다르지만 문화라는 ‘씨앗’의 가치는 다르지 않다. 그 뿌리는 느리지만 깊다. 그늘은 작지만 오래간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 이 시대의 공기와 문화를 돌아볼 시간은 지금뿐이다. 공짜로 얻는 지혜는 없다. 타이완의 도시가 말없이 전해준 이야기처럼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