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가회갤러리 & 카페. 작은 공간에서 펼쳐진 첫 전시, YUMMA의 1st EXHIBITION. 조용하지만 단단한 메시지 하나가 전시장을 관통하고 있었다. “예술과 디자인은 누구를 위해 쓰여야 하는가?” 지금껏 익숙했던 예술의 문법이 아니라, 익숙하지 않은 존재들에 대한 응시. 이 전시는 ‘지배하지 않고 자라게 하는 창작’에 대한 이야기였다.
보이지 않는 다수, 그리고 보지 않으려는 관성. “세계 경제 피라미드 하층민, 연소득 3000달러 이하 인구 40억 명.” 예술은, 디자인은, 과연 이 40억 명을 위한 것이 된 적이 있었을까? 그동안 예술은 자주 욕망의 구체화에 봉사해왔다. 대상은 늘 ‘소수의 소유자’였고, 그들의 공간, 감각, 취향이었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건 비가시적 존재를 위한 미학. 이름 없는 다수를 위한 상상력. 디자인이 권력이 아닌 ‘기회’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예술은 선진국의 은혜가 아니다. “그들의 권리로서 주어져야 한다.” 이 말은 명확하다. 예술은 누군가에게 베푸는 고귀한 산물이 아니라, 삶의 가장 기본적인 표현권이다.
YUMMA는 이를 통해 묻는다. 내 작업은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내가 생각하는 ‘대상’은 실제 존재하는가? 그들이 이름도, 얼굴도, 배경도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예술의 장을 만들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예술을 ‘만드는 자’와 ‘보는 자’ 사이의 기울어진 윤리적 구조에 던지는 첫 균열이다. 소유하지 않고 자라게 하기. “낳으면서도 낳은 것을 소유하지 않고, 지으면서도 지은 것을 내 뜻대로 만들지 않고, 자라게 하면서도 자라는 것을 지배하지 않네.” 이 노자의 문장은 이번 전시의 철학을 그대로 반영한다. YUMMA는 말한다.
‘나는 그저 자라게 하는 사람이고 싶다.’ ‘내가 만든 형상이나 조형이 어떤 사람의 삶 어딘가에 닿아 그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하고 싶다.’ 그것은 예술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다시 보게 하는 것’이라는 태도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만 보고 세상 전체를 지레짐작하는 실수를 우리는 너무 자주 저지른다. 하지만 YUMMA의 첫 전시는 그 오류에 틈을 낸 첫 질문이자 실천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세상이 필요한 것이 서로 다를 수도 있음을 인식하는 일. 예술은 이제 ‘지배하지 않는 창작’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미래의 공공성을 설계하는 감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