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초여름날이었다. 도시의 온도가 확연히 달라진 계절, 아트보이는 불쑥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아트보이 발은 익숙하지만 동시에 낯선 땅 위에 놓여 있었다. 바람이 흘러가는 방향을 따라 시선이 멈춘 도시는 마치 에반게리온의 한 장면처럼, 불안하면서도 묘하게 설레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어느새 아트보이는 생각에 잠긴다.
지금 이 감각은 어디서부터 오는 걸까.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 어딘가에서 솟구치는 그 무엇. 낯선 이국 도시의 표면 아래에서 꿈틀대는 감정의 진동, 그것은 분명 아트보이에게 ‘예술촉감’이라는 이름의 언어로 다가온다.
예술촉감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현실의 파편들이 아트보이 안으로 흘러들어와예술감정의 집을 짓는 과정이다. 아트보이는 도쿄 도시를 걷는다.
다양한 브랜드와 토이들을 타고 흐르는 예술의 감정선, 그리고 누군가 흘려 버린 스니커즈 숍 조차도 아트보이에게는 예술언어가 된다. 그 언어는 머릿속이 아닌, 피부 아래의 근육으로 새겨진다. 아트보이는 그것을 느낀다. 보이는 것, 보이는 대로 두지 않고, 그 너머를 느끼는 법.
그것이 아트보이에게 주어진 예술감각의 임무이자 창작의 시작이다. 아트보이는 ‘중간적 존재’에 대해 회의적이다. 도쿄 도시를 구성하는 수많은 예술의 매개들, 광고판, 캐릭터, 패션, 피규어들. 이 모든 것은 분명 ‘무언가를 전달하는 도구’일 뿐이다.
하지만 그 자체가 메시지는 아니다. 예술은 이러한 중간적 존재를 뛰어넘어 진짜 메시지를 길어 올리는 작업이다. 중간적 존재에 머무르면 창작은 피상적이 된다. 아트보이는 창작자이며 동시에 예술가이다. 아트보이가 아는 예술은 진실에 가까운 것만이 살아남는다. 아트보이에게 진실이란 순간의 예술감각, 반복되는 일상 속 예외적 장면, 누군가 지나쳐 버린 작은 소소한 것들. 그것들을 포착해낸 감각, 그것이 바로 예술촉감이다.







